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카타리나 폰 보라 루터
남편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그의 아내의 견고한 성품과 가정생활에 성실했던 현숙함을 빼놓을 수 없다.
루터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의 부인이 된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는 원래 수녀였다.
루터(1483-1546)와 카타리나(1499-1552)의 초상화(루카스 크라나흐 작)
루터의 아내인 카타리나는 생계를 꾸리고,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학교와
방문자들을 위한 숙소 및
신학적인 대화를 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관리했다.
때로는 자신의 집을 구빈원으로 전환시키고,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모든 비용을 충당할 돈을 마련함으로써 루터의 가르치는 사역의 동역자가 되었다.
임종 시에 카타리나는
"나는 겉옷에 달라붙은 식물의 잔가시처럼 그리스도에게 달라 붙어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아내는 비텐베르크의 샛별입니다. 아침 일찍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고, 밭을 갈고, 가축을 먹이고, 거래하고, 맥주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합니다.
(루터의 아내 카테리나 폰 보라는 결혼 후 루터린(Lutherin)으로 개명했다.)
루터가 캐테라고 부른 카테리나는 스스로 수도원 탈출(?!)을 결심할 정도로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루터를 설득시켜서 결혼한 것도 캐테였다.
루터는 아내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순종적이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고,
"내가 다시 결혼 한다면 돌로 순종적인 여인을 조각해서 결혼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였다.
아내 카테리나는 16살이나 연하인데도 사회적으로 대단한 거물인 루터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다.
일화로 1525년 결혼 시 카테리나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추기경(1518년부터)이 보낸
50굴덴의 축의금으로 루터 몰래 땅을 산 적도 있었다.
루터가 노발대발해서 돌려주라고 했지만, 이미 사용해서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루터는 아내를 사랑했다고 한다.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지만,
"프랑스와 베네치아를 준다 해도 캐테와 바꾸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설교에서 "아내는 주군이고 나는 신하", "아내가 모세고 나는 아론"이라고
공처가 인증도 했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아내에게 이런 편지도 남겼다.
캐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경건한 남편을 가졌소
당신은 여왕님이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붕 꼭대기만 봐도 기뻐하는
당신의 남편에게 굴복하지 마시오.
캐테는 루터가 세속 일에 대해 서툴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물론 대가족을 먹여 살릴 사업까지 스스로 해야 했다.
루터는 작센 선제후로부터 이전에 몸 담았던 검은 수도원과 부속 토지를 제공받았고,
면세 혜택과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직 봉급과 선제후령 교회의 설교자였기 때문에
많은 사례금이 있었다.
[보통은 금전이 아니라 농산물같은 현물로 받았다고 한다. 추종자나 선제후나 귀족들에게는 귀금속 등을 선물로 받았는데, 당시 풍속은 금전으로 주는 건 천박해서라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봐도 모차르트의 쌈지돈은 소싯적 왕실에서 하사받은 금 모양 담뱃갑.]
하지만, 루터의 집에는 6명의 자녀들과 캐테의 과부 숙모까지 모여 살았고,
고아가 된 루터의 조카 6명까지 맡아 길렀으며,
그에 따라 대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유모, 집사, 하녀, 가정교사, 마부, 돼지치기, 식모, 머슴 등을
직접 고용하여 부렸고, 추종자들도 20명에서 많게는 30명이 눌러앉아 살았다.
때문에 루터가 버는 수입보다 거의 2배는 지출했다고 한다.
루터의 명성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기에,
이런 손님들이 오면 당연히 상다리 휘어지게 주안상을 차려오는 일도 많았다.
당연하게도 루터는 40년 동안 초반 생애를 학생과 수도자로 살았기 때문에,
살림살이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고 본인이 직접 가계부를 쓰다가
셈이 자꾸 틀리자 아내에게 맡겨 버렸다.
그런데 루터도 행복한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루터가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지출하면서 사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던 비결은, 아내 덕분이었다.
카테리나는 선제후에게 맥주공장 허가를 받아서 운영하고 판매했고,
품질이 좋아서 선제후 궁정에도 납품을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포도 농장도 운영했고 저장고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농사도 농장을 사들여 크게 지었으며
소, 닭, 돼지도 치고 오리들을 키우려고 연못까지 만들었다.
연못을 만든 김에 양어장까지 만들었다.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루터의 집은 점점 커져 갔고,
루터의 집은 북적북적한 대가족 수준을 뛰어 넘어 50여 명이 살고,
일하는 공장이나 일터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도원 생활에 익숙한 루터는 이런 집 형편이 매우 유감이었다.
옛 수도원 부지를 하사해준 선제후에게 은혜도 모르고 불평했는데,
"다시 집을 얻는다면 이딴 돼지우리는 사양하겠다고…"
루터는 사망 당시 많은 재산을 남겼고,
죽기 전 유언장에 직접 아내 카테리나를 단독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당시 풍습과 다른 일이었기 때문에 후견인들이 무시했다.
루터가 죽고 남긴 농장이 슈말칼덴 전쟁으로 초토화되자,
카테리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한다.
특히 피난 도중 마차에서 떨어져 입은 부상으로 고생했다.
결국 자식들과 함께 영지를 떠나 이주하다 폐렴에 걸려 53세로 세상을 떠난다.
시신은 자식들이 거두어서 장례를 치루어준다.
어머니께서 맛나게 해주신 김치볶음밥 헤헤 주말 행복했다.